금성초등학교 황석분교장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후산리 산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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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배경

황석리는 남한강은 서쪽으로 직류하고, 강안(江岸)에 황석뜰은 반원형으로 산하에 황석리 본동에 개설한 신작로는 원거리로 후산리, 방흥리, 사오리, 단돈리, 부산리, 장선리, 진목리, 오산리, 재구미․새마을․황골 등지에 거주하는 주민은 강변 길로 통행하고, 황석리 본동에 비료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주민이 신작로를 이용했다.
황석리 본동의 공회당에서 남서쪽으로 신작로를 따라서 약 400m 지점에 ‘느티나무거리’에서 선사유물이 출토한 지점에서 강변의 소로와 교차하면서 약 50m 행길가 우측에 3백여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청풍면의 보호수로 관리를 받았다.
이곳에 黃石初等學校의 명칭이 부여된 청동기시대 여성을 상징한 큰 선돌은 앞에 서고 뒤에는 남성을 상징한 작은 선돌이 나란히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설치한 반석에 앉아서 잠시 쉬면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강변쪽으로 일명 ‘고야말개’는 전국 최초로 인골이 발견된 선사유적지가 분포한 지역이다.
황석리 자연부락 돌다리[石橋]에 황석교가 위치한 사통팔달로 옛날에 잡곡을 교환한 5일장이 서던 곳으로 주점과 가겟방이 있었다.
이곳에서 동측으로 후산리와 황골로 진입하고, 남쪽으로 들판의 소로를 따라서 한강을 도강하여 계산리와 통하며, 학교의 정문에서 남서쪽으로 곡류하는 한강을 따라서 황석리 자연부락인 재구미를 지나서 방흥리․진목리․오산리와 통하며, 북서쪽으로 험준한 밧치재를 넘어서 사오리․단돈리․부산리․장선리 등과 통하여 산간에 위치한 학생도 고갯길을 넘어야 했으나 통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대덕산을 배산으로 양골짜기에 마을이 밀집해 있었고 마을 가구의 60%가 문화류씨로 구성돤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경작지는 대부분 밭이었고, 채소, 수박, 참외, 담배, 단무지용 무를 주로 재배했으며 논이 적기 때문에 시장에서 쌀을 구입해 식량으로 사용했다.
마을의 주산인 대덕산에는 2개의 제장(祭場)이 있었는데 마을에서 산신께 제사를 드리던 곳이라 한다.
서낭당 옆에는 두 개의 선돌이 서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선돌 밑 강병에 황씨 성을 가진 3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은 모두 힘이 센 장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장사 3형제는 서로 힘 자랑을 하려고 3개의 돌을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의 선돌이라고 한다. 이 선돌은 황씨가 세운 돌이라 해서 황돌 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돌이 쓰러지면 강 건너 마을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서 도망간다고 해서 돌이 쓰러지면 건너 마을 청년들이 물을 건너와서 세워놓고 심심하면 쓰러뜨리고 그러면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수름산 아래에 있는 후산리는 웃말, 아랫말, 단장골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전주이씨이고 그다음 문화류씨가 들어와 살았다. 마을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한국전쟁 당시에도 인근 사람들이 피난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이후산(李後산山리) 이라는 사람이 청풍부사로 부임하여 자기이름과 동네 이름이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두산(斗山)으로 부르게 하다가 이후산 부사가 돌아간 뒤에 다시 동네 이름을 후산리로 찾게 되었다고 한다.
후산리의 토질은 아주 좋기로 유명하였다. 일하다가 호미자루가 빠지면 호미자루 박을 돌맹이를 구하려고 한나절이 지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밭농사에 좋은 사질 양토로 밭 한 마지기만 있으면 생계는 물론 자식 교육비까지도 걱정이 없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지금 신 후산리는 양지바른 곳으로 청풍호가 한눈에 들어오고 수경분수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으로 고추와 담배 약초 등 밭농사를 주로 하나 경지 면적이 적고 젊은이가 적어 휴양지로서의 기능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되며 장기적으로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관광 휴양지로 개발이 더 필요하다고 하며 수몰전에는 마을에서 1년에 두 번 동제를 올렸는데 음력 정월보름에는 마을 입구에있는 서낭(성황)나무에 동제를 올렸고, 음력 시월초하룻날은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 제보: 류재환님, 류금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