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초등학교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신기리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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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도

지역사회배경

신구학구를 통털어 예로부터 관동이라 불렀는데 골이 12골이나 되어 순 우리말로 열 두 갓골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열두각골로 불리어졌다. 이렇게 마을 이름이 열 두 각골이라고 불리어져 왔으나 일제시 행정구역의 변동으로 오늘에 와서는 신한 1․2리 신기리, 사창 1․2리로 동명이 바뀌었으나 지금도 외지에서는 각골을 찾는 분들이 많다. 열 두 각골은 항골, 풀무골, 절골, 덧골, 도랏골, 황새골, 당골, 자장골, 방축골,길골, 새골, 상투골, 뱀골, 검수골 등 열 두 골이라 하는데 옛 열 두 각골을 정확히 아는 이도 없고 군지에도 명시되어 있지 안아 안타까울 뿐이며 마을 장노 몇 분의 의견을 모아 대략적인 것을 옮기며 더 확실한 근거를 찾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여기에 열 두 각골의조사된 부분과 기타 부락에 얽힌 유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기리
1) 위치
본 신기리는 본읍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사창리, 능촌리, 남쪽은 서부리와 동부리, 남쪽은 소수면, 북쪽은 신항리에 인접하고 있다.
2) 연혁
본 신기리는 본래 괴산읍 북하면의 지역으로서 새로이 터를 잡아서 마을을 이룩하였다 하여 새터말 또는 신기리라 하고, 불항면에 편입하였다가
1947년 1월 31일 괴산읍에 편입하였다.
3) 자연마을
당 골 : 새터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당집이 있어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이 지역에서는 제일 먼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곳으로 옛부터 구전되어 왔다. 그래서 집당 골곡, 당곡이라 이름지었으며 이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 터를 잡은 곳이 새터(신기)라고 전하며 당골과 새터 사이에는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여기에 장승이 서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당골 마을 앞에슨 사거리가 있고 쇠터거리라 불려지고 있는데 소토거리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며 소토란 삼한시대의 성지로서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 같다. 또 마을 옆을 토성모퉁이라 부르는데 여러해전 과수묘목을 식재하기 위해 땅을 파헤쳤을 때 돌과 흙으로 쌓은 담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토성을 쌍았던 흔적으로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몇 호 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많은 집들이 있었던 마을로 전해지며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로 추측된다.
황새골(신기리) : 신기에서 제일 큰 골짜기 황새골의 유래를 소개하면 신기교의 남쪽 아랫말 골짜기이다. 옛날에는 괴산에서 충주장을 보로가는데 이곳으로 다니게 되어 장고개가 생겼다. 그래서 지금도 장고래라 불린다. 고개 마루 밑에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황새골로 이름지어졌다 한다. 지리학을 연구하는 이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명승(명당)이라 하여 그곳에 산소를 썼는데 지금은 목뫼로 묵고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닌가 싶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당날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도우로 왔을 때, 조선의 산세가 좋아 명장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산의 맥에혈을 많이 끊었는데이곳도 산의 맥이 두 곳이 끊겨 있다. 우연은 아닌가 싶다.
용 당 : 새터말 동북간에 있는 마을로 옛날 용이 승천한 못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말 : 용당이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도락골 : 당골 서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피난갔다가 돌아와서 모여사는 마을이라서 이름지었다.
절 골 : 새터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적에 절이 있었다 하여 생긴 마을 이름이다. 신기교의 북쪽에 위치한 절골, 이름 그대로 옛날에는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금도 절골 안터에 가면 기왓장이 나온다. 안터의 기왓장을 서울에 가져다 감정한 결과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것으로 판명되어 마을은 그 전에 생긴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마을도 없어지고 외딴집 한 채가 외로이 절골을 지키고 있어 역사의 흐름의 굴곡을 보는 듯 하다.

신항리
1) 위치
신항리는 본읍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사창리, 남쪽은 신기리, 서쪽은 소수면, 북쪽은 불항면에 인접하고 있다.
2) 연혁
신항리는 본래 괴산군 북하면의 지역으로서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야동 신곡리 항동 일부를 병하보하여 신곡과 항동의 이름을 따서 신항리
라 하고 불항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1월 31일 괴산읍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
새 골 : 항골 동쪽 골짜기에 새로 이룩된 마을이다.
항 골 : 신항리 본동으로서 괴산에서 음성 쪽으로 통하는 목에 있다. 옛날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이가 이곳에 들러 지역 산세를 관찰하고 항구에
속할 지역이라는 말을 남기고 간 후 자연 부락이 2개인데 골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항골,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항골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신항1․2리로 나누어지고 있으며 이곳에는 말대로 큰 저수지가 생겨 열 두 각골 들판을 적셔 세세년년 풍년을 들게 하여 관동의 젖줄이 되어 오고
있으며 휴일이면 전국각지에서 낚시꾼들이 몰려들고 있는 실정으로 항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그대로들어 맞은 격이 되었다.
아래목 : 항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항골 : 항골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불목골 : 항골 동북간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대장간이 있었으므로 풀무골이라 부르던 것을 불무골로 다시 불뭇골로 변하여 부르고 있다. 이 마을 앞에 품무형 암석이 있어서 풀무야자를 써서 야동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부모골로 변하여 풀무곡이라 하는 이는 거의 없고 거의가 부모골이라 부른다.

사창리
1) 지명유래
지금부터 약 380년전 이조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서, 호를 매창당 또는 육우당이라 하는 신경진이라는 선비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항하여 후학을 기르게 된 후 그 후손들이 이곳에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상징이나 되듯 수령이 수백년이나 되는 큰 느티나무가 마을 입구에 의연한 자세로 마을의 수호신인양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동민의 각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이 인근에서는 가장 넓은 펜이므로 들판을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가정하고 자연부락이 네 동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사창리라 부르고 있다. 옛날에 큰말, 도랏말(사창1리)만을 부를때는 강창리라 불렀다고 한다. 와촌, 방축말(사창2리)은 세평학구이다.
2) 위치
본읍 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능촌리, 남쪽은 능촌과 제월리, 서쪽은 신항리, 북쪽은 불항면과 인접하고 있다.
3) 연혁
본 사창리는 괴사눈 북하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와촌리 삽절리 상강창리 하강창리와 불항면 세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살던 사창의 이름을 따서 사창리라 하고 불항면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1월 31일 괴산읍에 편입하였다.
4) 자연마을
원사창 : 사창의 원마을이다.
방축골 : 원사창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방죽이 있다.
강창(강창이) : 사창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조선조때에 사창과 강창이 있었다.
도란말 : 길을 돌아 모퉁이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하강창리(아랫강챙이) : 강창리 아래쪼겡 있는 마을이다.
상강창리(웃강챙이) : 창강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와 촌 : 방축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개와(기와)를 구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능촌리
1) 위치
본 능촌리는 괴산읍 동부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감물면, 남쪽은 제월리와 감물면, 남쪽은 신기리와 사창리, 북쪽은 불항면과 인접하고 있다.
2) 연혁
능촌리는 본래 괴산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도면의 길동을 병합하여 능촌리라 하여 불항면에 편입하였다가 1947년 1월 31일 괴산읍에 편입하였다. 옛부터 영의정의 직함을 가진 분의 묘가 있는 곳은 왕릉에 준하여 능자를 넣어 산 골(곡) 마을이름을 불러 왔는데 이곳 하담 김시양의 조부인진사 김석이 임란 때 원주목사로 순사한 사남 김제갑과 손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충신으로 책훈됨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된 분묘가 있는 곳이라 관례에 따라 능말이라 불러왔고 행정구역 명칭을 한문으로 책정할 때에 능촌리라 이름지었다. 군주주의시대의 영의정(현국 무통리격)은 1인지하(군왕)에 만인지하(무수한 국민)이라 하여 국민 스스로가 군왕에 준한 대우를 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