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초등학교 백마분교장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 11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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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도

지역사회배경

노송리(老松里)
1) 노동
- 위치 : 본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송오(松塢)마을, 서는 도안면, 남은 중흥리 중흥미을, 북은 음성군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동리와 송오리를 병합하여 老松里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노동, 송오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송오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 늙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老松洞으로 불리다가 老洞이라 약칭함. 1997년 1월 마을 유래비를 건립하면서 마을 입구에 있는 용바위의 명칭을 따서 마을 이름을 용바위로 할 것을 결의함.
- 자연마을
양달말 : 노동리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쪽에 있는 마을. 즉 동향마을
응달말 : 노동리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중심으로 음지쪽에 있는 마을. 즉 서향마을
- 지명산천
사모바위 : 증흥리와 경계인 개울가 들녘에 사모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경지정리때 묻혀버림.
뒷구말 : 노동리 입구 왼쪽 산자락에 있는 골. 안동 김씨 묘막이 있다.
덤배바위장등 : 덤배바위가 있는 장등, 전에 도굴꾼들이 쇠꼬챙이로 찔러본 적이 있다.
사령골 : 작은 덤배 오른쪽에 있는 골, 옛날 살인이 났다고 한다.
얼음박골 : 바위가 얼기설기 얽혀 있는 곳.
바라골 : 동네에서 바라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쇠마장골 : 일제 시대에 소를 묻은 무덤이 있던 곳
용바위 : 노동마을 입구에 위치한 바위로서 500여년 전 용이 나와서 놀다 갔다고 하여 용바위라 하는데 현재용이 누웠던 자리에 흔적이 있어 이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지금까지 초석 같이 관리하고 있으며 마을 명을 용암 마을로 개명해 줄 것을 주민 전체가 희망하고 있다.
늙은 나무들 : 매우 오래된 물푸레나무가 있는 근처의 들.
오리나무들 : 동네 위쪽 저수지 아래에 있는 들.
- 유물 유적
노동리 사당 : 일제시대에 장의전(張宜塡)이 처음 가르쳤으며 그 후 장조원(張潮源)이 가르쳤다. 6?25때 폐지되었다.
옥구장씨 재실 :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린 옥구(沃溝) 장씨인 장세익(張世翊)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라 하는데 동네 위쪽 산에 있던 것을 20여년전 응달말 중앙으로 옮겼다고 한다.

2) 송오리(松五里)
- 위치 : 본 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응암(응암)마을, 서와 남은 노동마을, 북은 음성군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송리와 송오리를 병합하여 노송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노동, 송오로 분할 관리하고 노송리에서 중심 되는 마을로 언덕 위에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
- 지명 산천
갈골 : 백마초등학교에서 작은 송오리 고개를 향해 오다보면 왼쪽에 있는 골. 안동 김씨 재실이 있었다.
말굴이재 : 작은 송오리 고개. 사리면 송오리와 음성군 원남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송오마을 북서쪽에 있는 고개로 이조때 정승이 말을 타고 넘다가 말이 뒹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청안 보천간 군도로 책정. 2차선 확?포장이 완료되었다.
흔들바위 : 도장골 오른쪽에 있는 바위. 1800년대 말에 송오리에서 태어난 김시은(金時隱)이 원남면에 살았는데 이 바위에 ‘김시은 개바위’에 있는 ‘시은’이라 새김
사근절 : 송오리 뒤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백년전 주민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없어졌다하여 사근절이라 부른다. 이 절터에 머리부분이 잘려나간 2m 길이의 불상이 출토되었는데 누군가 매각함.
번덜말랑 : 가랑잎을 많이 긁어가 번덜거리는 말랑. 말랑은 말림으로 산에서 나무를 해 가는 것을 말린다는 뜻이 담겼다. 그리하여 말랑은 대개 산을 달리 부르는 말로 쓰인다.
어둔골 : 어두운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 이곳에 백마의 무덤이 있다. 영산 신씨의 재실이 있다.
- 유물?유적
용마(龍馬)무덤 : 백마산에서 백마가 인조 27년에 이곳으로 내려와 죽어서 묻힌 곳이라 하여 용마무덤이라 하고 가믐이 닥치면 이곳에 와서 우기를 고대하는 기우제를 올렸다 함.
송은(松隱) 신보연(辛寶演) 공적비 : 빈민을 구제한 공을 기리는 비 1987년 건립
구장 신봉교(區長 辛鳳敎) 기념비 : 이득을 생각지 않고 의리를 지킨 점을 기리는 비. 정축년 건립

소매리(笑梅里)
백마산 :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와 소수면 소암리 사이에 있는 465m.
소매리는 본래 소마동리였다. 조선 영조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여지도서, 호구총수」에서 서면, 소매동이라 하였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소마산이룬봉학산, 여보광상연청안계, 소마산은 한편 봉학산이라고도 하는데 보광강산과 더불어 청안 경계로 이어진다.??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괴산군읍지」??서면소마동리, 자관서거사십리??서면에 있는 소마동리는 괴산군청으로부터 서쪽으로 사십리 떨어져 있다. 로 기록되어 있다. 1899년에 간행된 괴산군 읍지에는 백마산이라 표기돼 있다. 이처럼 소마산이 백마산으로 불러지게 된 것은 개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는 윤훤과 백마의 설화가 광포 되면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 을 종합해 보면 지금의 백마산은 봉학산과 소마산이라 불렀으며 지금의 소매리는 소마동리라 불렀었다.

1) 대기(大基, 큰터)
- 위치 : 본면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둔기마을, 서는 중흥리 중흥마을, 남은 사담리 사담마을 북은 응암마을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둔기리 남정리 응암리 사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매산의 이름을 따서 소매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되어 행정마을 둔기, 대기, 응암으로 분활 관리하고 있다.
- 지명산천
음복골 : 목골산내에 단양 우씨가 제사지내고 음복주를 마시던 곳
괴물바위 : 사담으로 넘어가는 2차선 포장로 오른쪽에 있는 바위, 이곳에서 천지 신명에게 제사를 지냄.
중상골 : 목골산내에 단양우씨가 제사 지낼 때 중인(中人)들이 대기하고 있던곳

2) 둔기리(屯基里, 둔터골)
- 위치 : 본면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소수면서는 대기마을 남은 사담리 사담, 하도마을, 북은 응암마을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둔기리, 남정리, 응암리, 사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매산의 이름을 따서 소매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되어 행정마을 둔기, 대기, 응암으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둔기마을 : 이조 연산군 때 마적 떼를 물리치기 위하여 군사가 주둔하였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
- 지명산천
똥싼골 : 보광산 정상에서 마을 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바위가 쭉 깔려 있어 올라가기가 똥을 쌀 정도로 매우 힘이 듬. 실제 이 마을에 사는 여인이 나물을 캐러 갔다가 그곳에서 아기를 낳고 똥을 쌌다. 그 아들은 김도묵이다. 새로운 일화와 함께 새 생명과 새로운 지명이 동시에 탄생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현장이다.
화약골 : 돌이 쭉 깔려있는 골짜기라 언젠가는 돌을 깨는 석공이 나올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솟대배기 : 소매리 저수지 축조로 수몰됨. 백마산에서 말이 내려와 뛰어다녔다고 함.
- 유물?유적
기와공장터 : 잠재근처, 기와 파편이 수습된다.

3) 응암(매바위)
- 위치 : 본면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소수면, 서는 노송리 송오마을, 남은 둔기마을, 북은 음성군에 접하고 있다.
- 연혁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둔기리 남정리, 응암리, 사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매산의 이름을 따서 소매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 둔기, 대기, 응암으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 자연마을
매바위(웃말) : 소매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뒷산에 매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
뱀바위(아랫말) : 뱀이 많아서 불러진 이름.
- 지명산천
절골 : 절이 있던 골. 백운사(白雲寺)가 있고 이곳에 백운대라는 일명 장수바위가 있다.
- 유물?유적
백마굴 : 백마사 100m 지점에 있는 굴로 백마가 나왔다며 붙여진 이름. 열두째 문까지 있어 약 4Km의 긴 굴로 작은굴에서 불을 피우면 백마굴에서 연기가 나온다하여 지금은 박쥐의 서식지로 유명하고 음성지역에 위치함.
백운사 : 소매리 산 20 백마산에 잇는 절로 1935년에 송운제가 세움. 통칭 백마사라 함.
장수바위 : 백운사 뒤에 있는 큰 바위. 300년전에 윤개천이란 장수가 살았다. 나라에서 그를 잡아다가 끌로 어깨를 파매 부모에게 받은 몸을 더럽게 버릴 수 없다하여 떨어지는 살과 뼈를 앞자락에 주워 모았다. 이를 보고 효자가 역적이 될리없다 하여 개천군수를 제수하였으나 부임 도중 죽었다. 이때 별안간 백마굴에서 백마가 나와 윤개천의 집 주위를 울며 돌다가 죽었다 함.

중흥리
1) 산정(山亭)
- 위치 : 본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사담리, 서는 도안면, 남은 진암마을, 북은 칠성, 중흥마을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흥, 사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중흥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 중흥, 칠성, 산정, 진암으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 자연마을
도화동(桃花洞) : 도화동에 거주하는 김형식이 8세 되던 병인년(1926년)에 장마가 심해서 물이 주춧돌까지 차 올랐다. 그래서 그 부모들이 수해를 입지 않을 높은 지대를 물색중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집을 지었다. 뒷산아래 개복숭아 나무의 꽃이 많았으며 집집마다 울타리 주변에 개복숭아 나무를 심어 동네가 환하게 꽃으로 뒤덮힐 정도였다. 그래서 이름이 없던 이 동네를 동네사람들이 도화촌으로 삼자했는데 사람들이 도화동으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산정 : 복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말엽에 한산 이씨들이 정자를 세우고 마을을 이루어 그 후 산정이라 불림.
- 지명?산천
달밭자리 : 도화동 마을 중간지점에 있는 밭자리. 김영장이 사망했다는 거짓으로 장계 올린 전설. 김영장(營長은 벼슬이름)이라 불리는 인물의 할머니인지 어머니인지는 모르나 지나가는 중이 이질로 쓰러져 있는 것을 집으로 되려다 잘 간호해 주었다. 그 중은 각원대사라는 분이었다. 중이 소생하여 하는 말이 다른 것으로 은공을 갚을 길은 없고 집터나 하나 봐 준다며 지금 달밭자리에 터를 잡아 주었다. 그 후 영장이 태어났는데 체격이 커서 웬만한 문으로 드나들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 후 임오군란때 영장으로 뽑혔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난리에 죽을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사망했다는 장계를 올려 심모씨가 도대장이 되었다 한다. 그 후손에는 선달이 많았으나 그 후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어 그 일부가 지금 진천군 산정말에 산다고 한다.
산정 : 고려 말엽 한산 이씨들이 정자를 세우고 마을을 이루어 산정이 되었다.
- 유물?유적
효열각 : 김상혁은 자기 어머니가 조를 발로 비비다가 힘이 들어 그 자리에서 잠이 들자 13세인 그가 발로 비벼 털었다. 한번은 부모가 아파서 딱따구리가 좋다하여 가을부터 잡으러 다녔으나 잡지 못하였는데 아궁이 속으로 비둘기 두 마리가 달려들어 그것을 잡아 해 드렸드니 완쾌됐다. 딱따구리는 잡기가 어려운 새라 하늘이 정성에 감동하여 대신 비둘기를 보내준 것이라 사람들은 여겼다. 부모가 다리를 분질렀는데 눈속에 상골을 구하러 다니자, 도사의 지시로 구해 드렸다. 장마로 논이 묻히자 흙을 파내는데 기르던 두 마리의 개가 입으로 돌을 나르는 등 도와주다가 개들이 기진 하여 두 마리 모두 죽었다. 전주 이씨는 자기 남편이 중병이 들었다. 지나가는 대사에게 시주하고 혹 치료약을 알면 일러달라 하니 대사가 인육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이씨는 넓적다리를 도려 내어 삶아 김상혁에게 주면서 아랫마을에서 소고기를 구해왔다고 했다 한다. 그 후 병이 나았다고 한다.

2) 산정
- 위치 : 본 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소매리, 서는 칠성 마을, 남은 사담리 사담마을, 북은 노송리 노동마을에 접하고 있다.
- 연혁 : 본래 괴산군 서면의 마을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리, 사장리, 진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흥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중흥, 칠성, 산정, 진암으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원흥리는 중흥리의 원 마을로 현재의 중리 뒤편 도롱골에 있다가 후동이라 일컬었고 현 위치는 한일 합병시 옮기면서 가운데 위치하였다고 하여 중말이라고 하다가 그 당시 이장 유흥 하씨의 가운데 자를 따서 중흥리라고 하였다.
- 지명?산천
뱀산 : 백마초등학교 서쪽방면에 있는 산. 백마초등학교에서 약 5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백마산에서 이 뱀산까지 길게 뱀이 누워있는 형상으로 뱀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고 함.
- 유물?유적
중말사립학교 : 지금 마을 창고자리에 유병서가 1910년대에 설립하여 4년 과정으로 운영하였다. 유희영과 유복성이 교사로 활동했다. 이 학교는 보광초등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약 20년간 존속했었다. 유일영은 14세때 졸업했다.

3) 진암(鎭岩, 진지바위)
- 위치 : 본 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과 남은 사담리 사담마을, 서는 도안면, 북은 산정마을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마을로 마을 뒷동산에 배모양의 긴 바위가 있어 이를 진지암이라 부른다. 이 마을의 이름을 바위의 이름을 따서 진암이라 부름.
- 자연마을
진지바위(진암) : 가마골에 있는 바위. 옛날 보광산 장수와 백마산 장수 그리고 이곳에 사는 장수가 서로 힘겨루기를 했다 한다. 바위를 서로 던지면 서로 받았다고 한다. 이곳의 장수가 지금의 진지바위에서 밥을 먹었다 하여 진지바위라 하는 설이 있다.(진지는 밥의 높임말)

4) 칠성배(칠성바위)
- 위치 : 본면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과 북은 중흥 마을, 서는 도안면, 남은 산정마을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괴산군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리, 사장리, 진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흥리라 해서 사리면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중흥, 칠성, 산정, 진암으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 자연마을
칠성배 : 바위 일곱 개가 있어 붙여진 이름. 경지정리 때 파손 매몰시켰음. 아마도 고인돌이나 숭배하던 돌로 추정됨.
- 지명?산천
까치바위 : 국골 아래에 있는 마을. 바위 아래서 무속 행사를 함. 일제시대 이 바위를 깨트려 제방을 쌓으려 할 때 유인목이 말려 보존되었음. 지금도 남포를 터트리려고 판 구멍이 남아있음.
도롱골 : 절골 오른쪽에 있는 골. 옛날 이곳에 마을이 있을 때 도독이 많이 들어 지금의 위치로 마을이 내려옴.
- 유물?유적
구장 유흥하 기념비 : 유흥하가 잠업을 장려하는 등 마을을 부유하게 한 공을 기리는 비. 소화 13년(1938년)건립.